존재의문법 두문동과 닫힌계(係)에 대한 소소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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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몽각夢覺 작성일 26-07-22 20:21 조회 348 댓글 0본문
북한지역인 황해북도 개풍군 쯤으로 추정되는 두문동(杜門洞)의 모습. 언필칭 북한스럽기도 한 건..그렇잖아도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조어를 낳은 두문동인데, 현존 문 처닫고 살기 <세계 챔피언> 인 군상들이 선잡고 패돌리는 그 짝 동네이고 보니 고증이다 뭐다 하는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건 고색창연히 전해져 내려오는 설 자체는 이렇다. 두문동이란 '여말선초(麗末鮮初)' 정치적 격동기, 고려가 멸망하자 과거 고려의 신하 72명이 위화도 통수를 시전한 후 신장개업 한 이성계의 조선을 거부하고 개풍군 성가산 서쪽으로 기들어가 똬리를 틀고 살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개인적인 관점에서 볼 때 두문동 류의 정치행위란 '충절'이란 모습으로 웅변되기에 그다지 소망스러운 모습은 아닌것 같다란 생각.
닫힌계(係) 문 뒤의 세계 '두문동(杜門洞)'

비록 그 때의 선비들은 '정치적 신념'으로 문을 걸어 잠갔고, 지금의 나는 '다리의 불편함'으로 문을 닫게 된 셈이지만, 세상과 단절된 공간에서 느끼는 고독과 번뇌 만큼은 시대를 관통하여 절실히 공감되기 때문 아니겠는가.
닫힌계의 '계(系)'란 것은 System인데 이는 이어져 있다란 의미와 상통한다. 그래서 열린 시스템이니, 닫힌 시스템(Closed system)이니 하는 것은 없다. 모든 시스템은 닫혀 있다고 봐야 한다. 계는 '이을 계(系)'인데 이어지지 못하면 계가 아니란 의미다. 마치 족보와 같다. 족보란 이어져야 족보지 끊어지는 족보는 없다. 하지만 현실은 양자를 입적하는 수법을 쓰거나 도네이션 비슷하게 한 후 슬그머니 타 문중에 끼어든다.
짝퉁들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이어지는>계는 닫힌계이며, 열린계는 계가 아니므로 열린계라는 말은 필요없다. 닫힌계는 사실 닫혀있지도 않다. 다 필요없는 말이다. 그냥 계라고 하면 되는데 닫힌계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은 두 글자 이상으로 단어 만들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냥 계라고 하면 계모임과 헷갈리기도 하고, 진짜는 넘치는 짜베기들 때문이다. 내가 '족보란 이렇다' 하고 설명하는데 '근데요 제 족보는 안그렇걸랑요' 하고 엉기는 넘 꼭 나오기 떄문이다.
조선 17대 영조 임금이 송도(개성) 일대를 순시하던 중 조선왕조 개국에 반대하던 선비들을 숨지게 한 두문동이라는 골짜기를 지나게 되었는데, 당시엔 <부조현>이라 했다. 「영조실록」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영조 16년(1740년) 9월 1일자)다재다능한 전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주요 관심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수영장을 철창에 가둬 버렸어. 닫힌계(係), 이어져가고 있음이 느껴지는 창 밖이다.
실상은 열린문, 두문재 방에서 청담(淸談)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몸의 불편함(단지 조금 불편한 수준)은 내 삶의 반경을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으로 좁혀버렸다. 마음대로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고 창 밖의 풍경만 바라봐야 하는 처지가 되니, 문득 역사 속 두문동 선비들의 면면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때 쓰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은 바로 이 고결하고도 쓸쓸한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했다.
"성문을 닫아걸고(杜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不出)."

당시 선비들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길을 택했다. 현실과 이상이란 관점에서 살필 떄 선뜻 이해가 되어 와닿지만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이방원의 회유도, 벼슬길의 부귀영화도 거절한 채 그 좁은 골짜기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여생을 보냈다란 것인 바, 이들의 완강한 거부에 분노한 태조 이성계가 골짜기에 불을 질렀음에도, 단 한 명도 빠져나오지 않고 불길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비극적인 전설(?)이 내려옴을 살필 때 고증의 필요성을 느끼는 바다.

두문동 선비들의 이야기는 슬프지만 완결된 역사로 남았다. 하지만 나의 '두문불출'은 끝이 정해져 있는 일시적인 쉼표일 뿐이다.
옛 선비들이 어두운 골짜기 안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서책을 읽고 마음을 다잡았듯이, 나 또한 이 고요한 고립을 내면의 에너지를 채우는 계기로 삼고 싶을 뿐이다.
문을 걸어 잠근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문을 다시 열고 나설 세상의 공기는 더욱 눈부시고 소중하게 다가올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지치지 않고, 몸과 마음이 온전히 회복되어 세상 밖으로 당당히 걸어 나갈 그날을 조용히 준비해보는 거다.
2026.7 벨리 두문재(杜門齋)에서 몽각夢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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