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두문불출과 72현 이야기를 굳이 더듬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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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상천리 작성일 26-08-26 23:22 조회 216 댓글 0본문
육룡이나르샤 37회는 조선건국을 그려냈다. 공양왕이 폐위되면서 예블리 척사광은 사랑하는 사람과 조용히 살기 위해 떠났고,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나, 고려를 따르는 선비들이 새 왕조에 협력치 않고 숨어 버리는 바람에 곤혹을 치르게 되었다. 우리도 척사광을 더 이상 보기 힘들어 곤혹을 ㅠㅠ

이들이 숨은 곳은 두문동. 유생들이 두문동에 몽땅 숨어 체제의 정통성에 금이 간 상황. 이를 타개해 보겠다고 이방원이 나서며,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어차피 육룡이나르샤는 퓨전이긴 하나 사극임은 분명하고, 따라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역사에 기반 하는바, 우리는 이 에피소드가 바로 두문불출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끝이 어떻다는 것 역시 역사에 조금 관심 있으신 분들이라면 다들 잘 아실 것이다.

사극의 스포는 역사인지라, 그냥 부담 없이 두문불출 이야기를 살펴보자 (어차피 육룡은 드라마이니까 이 이야기를 좀 더 극적으로 잘 각색해서 나올테니 굳이 스포라 하기도 어려울 듯 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의 충신 73명은 두문동에 근거하여 나오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제 아무리 충신이라 해도 불길이 타오르면 이겨내지 못하고 나올 것이다’ 라며 두문동 주변에 불을 놓았다. 하지만 딱 한명을 제외한 모두가 불길에도 꼼짝하지 않은 채 나오지 않았고 결국 모두 화마 속에 사라지며 그 생을 마감했다.
후대에 이르러 충의와 절개를 지키느라 목숨마저 버린 72명의 선비들을 72현으로 기리게 되며, 이들이 불길 속에서도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다고 하여 ‘두문불출’ 이라는 말이 생겨 났다.
아, 그리고 이 때 유일하게 뛰쳐나온 1명의 선비는 후에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니, 그가 바로 검은소-황소 에피소드와 그래 니 말도 옳다 이야기로 유명한, 노인 강제 노동의 희생양 황희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실은 역사적 사실과는 약간 다르다. 황희가 늙어서까지 뺑이 당한것은 사실이다.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냐
우선, 두문불출의 배경이 된 ‘옛 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고 불에 타 죽었다’ 라는 이야기부터 실제 벌어진 일과는 좀 다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넘어가면서 많은 고려의 신하들이 의리를 지키고자 조선 왕조 출사를 거부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들이 특정 지역으로 숨어 들어갔고, 이들을 죽이려고 불을 놓은 일은 없다.
태종이 개성의 인재들을 등용하기 위해 과거를 보게 했는데, 그곳 명문가 50여 가문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를 부조현이라 이름 붙였는데, 사람들이 ‘명문가 사람들이 부름에 응하지 않고 두문불출 하였다’며 동리 이름을 두문동이라 부른 것이다.
이런 내용이 처음 사서에 나오는 것은 영조대, 왕조가 바뀐지 350년이나 지난지라,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고려의 궁궐터를 돌아본 영조가 신하들에게 ‘부조현’에 관해 물었고, 이에 대해 이회원이라는 신하가 위의 이야기를 하면서 두문동과 두문불출 이라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다.
그러니까 두문동에서 두문불출이 나온 것이 아니다, 두문불출에서 두문동이 나왔다. 즉, 두문동보다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먼저다. 두문불출 >>>>>> 두문동
그렇다면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언제인가?
일단 조선이 건국되기 훨씬, 훠얼씬 더 오래전에 이미 이규보가 편지에서 ‘두문불출’ 이라는 말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당 태종때 편찬된 역사책 진서 에도 나오며, 사마천의 사기 상군열전에도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기록된 바 있다. 두문불출의 역사는 무명의 역사보다도 깊다.
게다가 72명이라는 숫자 역시 후대에 들어 온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태종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던 가문은 50여개라고 하니 꼭 72명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72명이라는 숫자 자체가 실은 유학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숫자이니 후대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만든 수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72명은 공자의 문묘에 배향된 제자 72현을 본따 설정한 것으로, 두문동 충신들을 공자 제자들에 비견하여 현인으로 받들려는 의미가 크다. 참고로 두문동 현인 숫자가 72명이 된 것도, 영조를 통해 두문동이 알려진지 10여년이 지난 뒤의 일이며, 72명의 명단도 각 자료들마다 제각각 다르다.
한마디로 두문동 72현의 이야기는 과거에 있던 이야기를 각색하고 윤색하며 덧붙인 이야기라는 점이다.
한편 두문동 72현 이야기가 이렇게 사람들 마음 속에 깊이 각인 된 것에는 영조의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는 분석도 있다. 붕당의 다툼이 심하던 시기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일편단심 왕을 따르는 충직한 신하들이 매우 절실했다.
따라서 능행길에 두문동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세상에 알리고, 신하들에게 왕에 대한 충정을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72현까지 배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두문동 충신들에게 제사가 거행되고 비석을 세워 기념하게 하며, 이들의 후손을 특별히 등용한 것도 모두 영조대에 이르러 시행된 정책이다.
한편 드라마에서도 나오는 조선 왕조에 가장 극렬히 반대하는 유생들인 목은 이색과 우현보, 그리고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지만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킨 유학자 야은 길재의 자식들은 모두 조선에서 벼슬을 했다. 마지막 충신으로 추앙 받던 정몽주의 아들 역시 조선 왕조에서 벼슬자리에 올랐다.
길재는 아예 출사하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의 고려를 향한 마음을 따라 너도 조선의 임금을 섬기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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